모래가 물처럼 흐르는 순간
2011년 동일본대지진 하면 대부분 쓰나미를 떠올린다. 하지만 쓰나미 피해 지역인 도호쿠 해안과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쿄만(東京湾) 매립지에서는 전혀 다른 재해가 동시에 일어났다. 지바(千葉)현 우라야스(浦安)시의 아스팔트 도로에서 물과 모래가 함께 솟아오르고, 멀쩡하던 주택들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구조물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지반이 갈라진 것도 아니다. 지반이 순간적으로 물처럼 변했다.
이것이 액상화(liquefaction)다. 느슨하고 포화된 모래 지반이 진동 하중을 받으면 내부 간극수압이 급격히 상승하고, 결국 흙 입자 사이의 유효응력이 0에 수렴하면서 지반이 전단강도를 잃는 현상이다. 교과서 표현을 빌리면, “토립자들이 물에 떠 있는 상태”가 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 메커니즘
유효응력으로 이해하기
흙이 하중을 버티는 것은 입자와 입자 사이의 접촉력, 즉 유효응력(effective stress) 덕분이다. 전단강도는 유효응력에 비례한다.
σ′ = σ − u
총응력(σ)에서 간극수압(u)을 뺀 값이 유효응력이다. u가 σ와 같아지면 σ′ = 0 → 지반 강도 상실.
진동 하중이 가하는 문제
느슨한 포화 모래에 진동 하중이 가해지면 두 가지 반응이 경쟁한다.
- 압축 경향: 흙 입자가 재배열되면서 간극이 줄어들려 한다.
- 비배수 조건: 지진은 단시간에 끝난다. 간극수가 빠져나갈 틈이 없다.
물은 거의 비압축성이다. 간극이 줄어들려는 힘이 물을 통해 압력으로 전환된다. 즉 u가 급격히 오른다. 진동이 지속되면 u → σ가 되고, 그 순간 흙 입자는 접촉력을 잃는다. 지반이 일시적으로 유체처럼 거동한다.
Holtz, Kovacs & Sheahan(2011)은 이 현상을 퀵샌드 실험으로 시각화했다. 느슨한 포화 모래가 담긴 수조 옆면을 타격하면 추가 가라앉고, 수조 표면에 물이 솟아오르며, 압력계 수위가 일제히 상승한다. 교과서 속 실험이 현장에서 대규모로 반복된 것이 역사적 액상화 사고들이다.
발생의 세 가지 조건
다음 세 조건이 동시에 갖춰져야 액상화가 일어난다. 하나라도 빠지면 발생하지 않는다.
| 조건 | 내용 |
|---|---|
| 흙의 종류 | 느슨한 포화 세립 모래, 실트질 모래 (점토는 해당 없음) |
| 포화 상태 | 지하수위 이하, 간극이 물로 가득 찬 상태 |
| 동적 하중 | 지진, 발파, 항타, 기계 진동 등 반복 전단력 |
점토는 액상화하지 않는다. 입자 간 결합력(점착력)이 있어 유효응력이 0에 근접해도 강도가 유지된다. 액상화는 기본적으로 비점성(cohesionless) 세립 모래의 문제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 — 주요 사례
1964년 일본 니가타(Niigata) 지진
규모 M7.6의 지진으로 니가타 시내 신아노강 하구 충적 모래 지반이 광범위하게 액상화됐다. 가와기시초(川岸町) 4층 아파트 단지가 지반 침하와 함께 최대 80° 가까이 기울어진 사진은 지금도 교과서마다 실린다. 구조물 자체는 거의 손상이 없었지만 지반이 지지력을 잃었다. 이 사건은 현대 지반공학에서 액상화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출처: Wikipedia, 1964 Niigata earthquake; Utah Geological Survey; Geoengineer.org, Liquefaction During the 1964 Niigata Earthquake
1995년 일본 고베(Kobe) 지진 — 한신·아와지 대지진
JMA 규모 M7.3(모멘트 규모 Mw6.9)의 지진으로 고베항 포트아일랜드(Port Island)와 롯코아일랜드(Rokko Island) 매립지 일대가 대규모 액상화를 겪었다. 지반 침하 20~50cm, 안벽 케이슨이 최대 5m 해측으로 밀려났다. 항만 컨테이너 선석이 전부 손상되며 기능이 수개월간 마비됐고, 피해 규모는 약 1조 엔(약 10조 원)으로 추산됐다.
출처: ASCE Journal of Geotechnical Engineering (1996), Liquefaction of Reclaimed Island in Kobe; ResearchGate, The 1995 Great Hanshin Earthquake And Liquefaction Damages At Reclaimed Lands In Kobe Port
2011년 동일본대지진 — 도쿄만 매립지 액상화
규모 M9.0의 지진에서 쓰나미 피해는 도호쿠 해안에 집중됐지만, 도쿄만 일대 매립지에서는 독립적으로 광범위한 액상화가 발생했다. 진앙에서 약 400km 떨어진 지바현 우라야스(浦安)시 매립지(8m 두께 준설 실트질 모래층)에서 모래 분출·주택 침하·기울기가 집중 발생해 약 1만 8,000채가 피해를 입었다.
출처: Tokimatsu et al.(2012), Liquefaction of soil in the Tokyo Bay area from the 2011 Tohoku earthquake; CiNii, Survey report on Liquefaction-induced damage in Urayasu city
2017년 포항 지진 — 국내 최초 액상화 공식 확인
규모 M5.4의 비교적 작은 지진이었지만,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 충적 모래 지반에서 액상화가 관측됐다. 부산대 손문 교수팀이 진앙 반경 2km 이내에서 흙탕물 분출 흔적 100여 곳을 확인했다. 기울어진 대성아파트도 액상화에 의한 지반 침하가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한국 지진 관측 사상 처음으로 액상화가 공식 확인된 사례다.
출처: 서울신문(2017.11.19), 포항 지진 국내 첫 액상화 확인; 국민일보(2017.11.19), 포항 지진 액상화 현상 첫 확인
어떤 지반이 위험한가
지형·지질 조건
- 하천 범람원, 구하도(옛 하천 흔적), 삼각주
- 해안 매립지(특히 준설 모래 사용 구간)
- 과거 논·소택지였다가 매립된 지역
- 지하수위가 얕은(지표면 4m 이내) 충적 저지대
입도 조건
액상화에 취약한 입도 범위는 0.075~0.5mm 구간의 세립~중립 모래다. 균등계수(Cu)가 낮고, 세립분 함유량이 35% 이하인 경우 위험성이 높다. 균등한 입도를 가진 해안 모래가 가장 취약하다.
현장에서 어떻게 판정하는가
간편 판정법 — Seed & Idriss(1971)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현장 표준관입시험(SPT) N값을 이용한다.
- 지진 규모(M)와 최대 지반 가속도(amax) 파악
- 각 깊이에서 지진 유발 전단응력비(CSR) 산정:
CSR = 0.65 × (σv / σ′v) × (amax/g) × rd - SPT N값을 상재압·장비 보정 → (N1)60 산정
- (N1)60으로부터 액상화 저항비(CRR7.5) 산정 (Youd et al. 2001)
- 안전율 FS = CRRM / CSR — FS < 1.0이면 액상화 발생 가능
국내에서는 KDS 17 10 00(내진설계 일반) 및 KDS 11 70 05(액상화 평가 기준)에 이 절차가 반영되어 있다.
SPT N값과 액상화 저항의 관계
| (N1)60 | 상대밀도 (Dr) | 액상화 위험도 |
|---|---|---|
| < 10 | 매우 느슨 (< 35%) | 매우 높음 |
| 10 ~ 20 | 느슨 (35~65%) | 높음 |
| 20 ~ 30 | 중간 (65~85%) | 중간 |
| > 30 | 조밀 (> 85%) | 낮음 |
일반적으로 (N1)60 ≥ 30이면 액상화 비대상으로 판단한다.
대책 공법 — 무엇을 골라야 하나
| 원리 | 공법 | 특징 |
|---|---|---|
| 밀도 증가 | 진동다짐(Vibrocompaction), 동다짐(Dynamic Compaction) | 느슨한 입자 재배열, 넓은 구간 적용 |
| 배수 촉진 | 자갈 드레인, PBD | 진동 중 간극수압 빠르게 소산 |
| 고결·보강 | 약액 주입, 시멘트 혼합처리(DCM) | 입자 간 결합력 부여 |
| 치환 | 굴착 치환 | 소규모·얕은 구간, 확실하지만 비용 큼 |
| 구조적 대응 | 말뚝기초(지지층까지), 지하연속벽 | 구조물로 대응 |
- 신규 개발지: 진동다짐 또는 드레인 → 사전에 지반 자체를 개량
- 기존 구조물 하부: 약액 주입 또는 DCM → 굴착 불가, 지중 보강
- 얕은 매립층(< 3m): 치환이 경제적
- 해안 매립지 광역: 자갈 드레인 + PBD 조합
기술사 시험 핵심 포인트
기술사 시험에서 액상화는 거의 매회 출제되는 주제다. 답안 작성 시 다음 구조가 효과적이다.
정의 → 발생 메커니즘(유효응력 관점) → 발생 조건 3가지 → 판정 절차(CSR·CRR) → 대책 공법 분류
특히 “왜 점토는 액상화되지 않는가”를 물으면, 점착력과 배수 특성의 차이를 유효응력 개념과 연결해 설명하면 고득점이다.
SPT 기반 액상화 판정 직접 해보기
지진 규모·최대 가속도·SPT N값을 입력하면 깊이별 CSR·CRR·안전율(FS)을 자동 계산하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Youd et al.(2001) 간편법 기준.
현장 체크리스트
- 부지의 지형 이력(구하도·매립지·논)을 확인했는가?
- 지하수위 깊이가 지표면 4m 이내인가?
- 시추 주상도에서 느슨한 세립 모래 층이 있는가?
- 설계 지진 규모(M)와 최대 지반 가속도(amax)를 파악했는가?
- CSR과 CRR을 깊이별로 계산하고 FS를 산정했는가?
- FS < 1.0 구간에 대한 대책 공법을 검토했는가?
- 대책 공법의 개량 심도와 범위가 취약 층을 완전히 포함하는가?
마무리
액상화는 지진이 클 때만 일어나지 않는다. 2017년 포항 사례가 보여주듯, 규모 5~6의 지진에도 취약 지반에서는 발생한다. 국내 충적 저지대와 해안 매립지 중 상당수가 잠재적 위험 구간이다.
중요한 것은 지형·지질·지하수·입도라는 네 가지 조건을 현장에서 조합해 판단하는 것이다. SPT N값 하나로 모든 것을 판정하려 들면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판단 기준과 대책 설계는 KDS 17 10 00, KDS 11 70 05를 기준으로 한다. 이 글은 개념과 흐름을 설명하며 개별 프로젝트 설계를 대신하지 않는다.